교인들 눈치보는 성경

아마도 20대 중, 후반부터일 것인데, 중3 때부터 의문을 가졌던 창세기 1장 1~2절을 세계 각 민족의 창세 신화와 함께
신화비평과 역사비평으로 읽으며,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라는 기독교 교의학이 심각한 오류를
갖고 있다는 생각에 일고의 회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無로부터의 창조 교리는 엄청나게 잘못되었다고
시간만 나면 떠들고 지적질 하던, 치기 어린 무모할 정도의 용감한 시절이 있었음을 감히 고백하건대!
물론 그 주장이 잘못된 것이 아닌 정확한 문서 읽기에 근본을 둔 것이므로 그 떠벌임이 무람없는 것은
아닐지라도, 지식의 길이와 넓이를 늘리지도, 넓히지 못한 어린 것이 그리 대들듯 아니면 삿대질하듯
나설 것은 그 무에냐는 약간의 민망함을 느끼는 것도 나이 든 탓일 것이외다.
그 민망함에 대한 보상심리인지 모르겠지만, 월튼 (John Walton) 교수의 저서 <창세기 1장의 잃어버린 세계>에서 주장하는
기능적 창조 이야기가 가끔 떠오르곤 합니다.
월튼 교수는 창세기 1장이 물질 기원의 서술이 아니라, 우주의 기능에 대한 설명이라고 말합니다.
즉 창세기 1장은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물리적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질서 정연한 세계 안의 역할이나 기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초기 세상에 질서와 체계를 부여하는 과정을 서술하려는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창조하다’의 뜻인 히브리어 “바라”가 갖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아마, 창세기 1장 1,2절만 제대로 읽어내도 물리적 창조가 아닌 기능적 창조에 대한 그의 논지를 금방 이해될 것으로
생각하여 창세기 1장 1~2절에 대하여 몇 마디 끄적거려 볼까합니다.
우선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성경은 개역 한글판이기에 그 번역본으로 올려 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1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2절)
두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했다는 결론적이고 선언적 문장이 우선하고, 뒤 문장에서는 혼돈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두괄식 문장으로 보입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그 부분의 문장 구조를 그렇게 이해했고, 철저히 문자 한 마디 한 마디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여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교리도 만들어냈을 터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본다면 현재 성경 해석은 철저히 서양인 시각에서 행해졌음을 알게 됩니다.
성서가 쓰인 당시의 상황 즉 고대 근동 지역의 언어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알려는 노력보다는 자신들이 처한 각 시대의 현재 상황에 기반을 둔 주석에
불과하다는 말이지요.
서구 유럽은 서기 4세기까지는 로마에 의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문화가 유입되어 정착하였지만 게르만 족이 유럽을
정복한 4세기경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분히 게르만 문화의 영향권 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서구 유럽 문화의 한 축인 헤브라이즘의 모태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강력한 게르만 문화에 의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쐐기문자로 쓰인 토판문서를 비롯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되는 학문적 가치가 높은 유물들로 말미암아 서양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고대 근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세기 초에 이르러서입니다.
이를 두고 “ 오리엔탈 르네상스 ”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 오리엔탈 르네상스에 힘입어 20세기 후반부터, 고대 히브리어 언어학 연구가
심층 발전하게 됩니다. 이 발전된 연구 결과는 창세기 1장 1절의 첫 단어인 베레쉬트(태초에)라는 부사가 독립 절을 이끌 수 없는 단어임을 밝혔습니다.
즉, 창세기 1장 1~2절을 두 문장으로 끊는 것은 잘못된 독법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고대의 대구법이 활용된 문장이므로, 첫 문장으로 분리되었던 부분은 독립된 문장이 아니라 시간의 부사절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학술적인 문법 연구 결과는 천지를 창조하고 나서 혼돈이 있는 게 아니라, “천지를 창조할 때” 이미 혼돈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더라고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성경 중에서는 표준 새 번역만이 그 연구 결과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대한성서공회 온라인에 올려진 표준 새 번역판에서 인용했습니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그 본문을 들여다보면 다른 번역본과 별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인용한 문장에는 밑에 보는 것처럼 각주가 달려 있고, 그 각주에는 다음처럼 번역될 수도 있다고 써 놓았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시작하셨을 때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이 각주에서는 마침표 대신에 쉼표를 찍었고, 그 각주처럼 창세기 첫 문장을 새로 읽으면 "無로부터의 창조"라는
창세기에 대한 기존 교리는 하릴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아마도 이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면 (물론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만 합니다만)
그 결과는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것이 자명하겠지요.
그래서 표준 새 번역에서는, 학문적으로는 각주의 해석이 맞는 것임에도,
그것을 본문으로 올려놓지 못하고 각주로 처리하여 놓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에 확증 편향적인 기독교인들은 기존의 틀에 머물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칠 것이 분명합니다.
예컨대 John Walton 교수와 Vern Poythress 교수의 논쟁이 그런 일단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도 합니다.
물론 두 교수의 논쟁이 일없이 벌이는 무의미한 논쟁이 아닐지라도, 제 눈에 비친 것은 그렇더라는 말입니다.
월튼 교수가 말한 기능적 창조는 혼돈 상태인 질료가 주어지고 거기에 하느님이 질서를 부여해서 이 세상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이고, 물질적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느님이 물질을 만들어 낸 것이라는 기존의
신학적 학설이자 교리입니다.
문장을 끊어 읽으면 물질적 창조로 읽히고, 부사절로 연결하면 기능적 창조로 읽게 되는 이 얄궂고도 불량한(?) 문장....
이 번역본이 한국 교회에서 채택되지 못하는 이유는 ..
결과적으로 성경이 교인들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질적 창조든, 기능적 창조든 간에 모두 인간이 만든 설(說)에 불과할진대, 문자주의에 얽매이지 말고 - 따지고 보면 성경이라는
경전도 하느님이 불러주고 사람이 받아 적은 것도 아닌, 그 또한 인간들의 저작물임이 확실한데, '축자 영감'이니 '유기적 영감'....
등이나 장 깔벵류의 '성령의 내적 조명'이니 하는 길게는 2000년, 짧게는 500년도 훨씬 지난 지극히 인위적인 철 지난 노래들은 그만 부르고 -
그저 인간이 이 지구 위에 나타난 것도 하느님의 은총이고 은혜롭게 태어난 인간들이 어떻게 타락하여 죄악에 물들어 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나?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미세먼지로 찌뿌둥한 오후여.....!
모두의 기관지 건강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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