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잠들은 고요한 이 밤에 어이해 나 홀로 잠 못 이루나
넘기는 책 속에 수많은 글들이 어이해 한 자도 뵈이질 않나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어제는 비가 오는 종로 거리를 우산도 안 받고 혼자 걸었네
우연히 마주친 동창생 녀석이 너 미쳤니 하면서 껄껄 웃더군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 판과 씨름했었네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 웬일인지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그건 너 그건 너 ~~~~~~~ 어 ---
사실 이장희는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는 아닌듯 합니다. 이 가창력이라는 말도 당시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지, 현재가
기준이 된다면 말은 달라집니다.
가수랍시고 춤추는 데만 골몰하여 붕어처럼 입만 벙긋대고 실제 라이브 무대는 피하거나 어쩌다 라이브를 하면
실소를 하게 하는 요즘 아이돌 그룹이나, 가창력이라고 하면 고래고래 악이나 쓰고, 미성(美聲)이라는 미명하에
시종일관 가성으로만 노래하는 요즘 가수들에 비하면 그는 훌륭한 보컬이지만, 노래 못하면 가수를 할 수 없었던
당시에는 그랬다는 말입니다.
툭 툭 내뱉듯 노래하는 이장희는 독특한 창법과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던 콧수염 등은 기성세대들에게는
삐딱하게 반항하는 모습이었겠지만, 젊은이들에게는 군사독재와 기존의 사회적 틀에 찌들어 있던 일상에서의
일탈이라는 - 일종의 자그마한 자유와 해방감 같은 속 시원한 쾌감을 주었었지요.
그러나 이장희가 독특했던 것은 외모나 창법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가요계는 사랑 일변도의 트로트가 주류였고 이제 막 윤항기의 키보이스, 신중현의 애드 포 그리고 김홍탁의
히 파이브에 이은 히식스같은 걸출한 록 밴드가 생겨났고, 뒤이어서 음악다방 쎄시봉에서 포크라는 장르가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쎄시봉 멤버 중 한명이었던 이장희는 국내 최초 포크계의 싱어송라이터였습니다. 이것이 그를
구분짓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지요. 즉 자신이 작사 작곡한 음악을 자기가 불렀던 최초의 싱어이자 송 라이터였습니다.
(물론 세계 어느 곳에 내놔도 전혀 손색이 없는 대한민국이 배출한 걸출한 로커 신중현이 싱어송라이터이고, 트로트에서는
현인이 싱어송라이터이기에 대한민국 가요계의 최초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신중현도 제 기억으로는 1974년에 발표한
「신중현과 엽전들」1집에 수록된 "미인"을 노래하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그 이전에는 작곡자이며 밴드 마스터였고 기타리스트였지
직접 부르는 노래를 들었던 기억은 없습니다. 어릴 적 기억이기에 별 신빙성은 없습니다만....)
포크 시대가 열린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이장희가 가세히기 전에는 "하얀 손수건"의 트윈폴리오가
그랬고 "딜라일라"의 조영남이 그랬던 것처럼 대체로 번안곡에 의존했습니다. 하지만 이장희는 직접 자기가 곡을
써서 노래했던 천재 싱어송라이터였습니다.
김민기와 한대수도 있었지만 시기적으로 이장희가 조금 빨랐으며 두 사람은 쎄시봉 출신의 상업적 포크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의
인기가수는 아니었던 순수 포크 계열이었지요. 이장희 이후 송창식과 윤형주도 싱어송라이터에 합류하게 되고 그 이후 수많은
싱어송라이터들이 명멸하게 됩니다.
이장희 노래의 또 다른 특징은 가사에 있었습니다. 당시 포크송 번안곡들이 매우 시(詩)적인 언어를 구사하였지만, 이장희의
가사는 친구들끼리 시시덕거리며 말하는 투의 어법인 구어체 가사였습니다. 이런 시도는 당시에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것들 - 콧수염을 비롯한 옷매무새, 껄렁껄렁 내뱉는듯한 독특한 창법, 구어체 적인 가사 등에서 오는 반항적인 분위기에
젊은 세대들은 환호했지만, 기성세대들에게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매우 불길한 삐딱함으로 읽혔을 것입니다.
"그건 너"와 "한잔의 추억"을 비롯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편지", "그 애와 나랑은", "자정이 훨씬 넘었네",
"한 소녀가 울고 있네", "창가에 홀로 앉아", "겨울이야기", "비의 나그네" "친구여", "나는 열아홉살이에요"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인기를 구가했고, 지금은 없어진 동아방송의 인기 심야 음악 방송 "0시의 다이얼" DJ로 활동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장희를 비롯한 포크계열과 신중현을 정점으로 하는 록 그룹들의 시대 반항적인 음악이 집권세력의 신경을 거슬러 1975년
대마초파동을 불러왔고 그들이 불렀던 노래들은 가요검열에 걸려 대부분 방송과 음반판매 금지처분을 받았었습니다. 이때, 이장희는 대마초 사건과 연루된 여러 명의 가수와 함게 구치소에 갇히기도 했었지요.
이런 이유로 혹자들은 포크송들이 민중의 반항을 불러일으키는 저항 음악으로 독재정권이 체제 유지에 심각한 위협을 느껴 대마초 파동을
불러왔다고들 하지만, 당시 생맥주와 청바지에 장발로 대변되는 청년 문화는 기성세대 전반에 대한 반항이었을 뿐 체제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지요.
당시 대한민국과 군사정권 체제에 위험했던 존재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북한의 공산독재정권과 그 추종세력들입니다.
군사적으로는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북한에 한참 열세를 면치 못하던 시절, 당면과제가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었던 당시 상황에서
단지 사회적으로 기강이 해이해질까 우려하는 기득권 세력들이 국민의 총화를 이루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물리적 폭력을
가했던 어이없는 사태라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 황당했던 사태가, 어쩌면 우리나라 대중가요 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에 있어서, 세계적 추세에 어깨를 견주고 전진할 수 있었던 토양을
황폐하게 만든 주범은 아닐까 합니다. 물론 먹고 사는 것이 문화를 앞지르는 중요한 일이겠지만요.....)
아마도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을 비롯한 포크송들이 민주화 시위현장에서 자주 불렸기에 포크 음악은 저항 음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결과만 보고 원인을 유추하는 어리석음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더불어 해봅니다.
이제 이장희에 대한 글을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보태는 글을 적어 볼까 합니다
사실 이장희는 포크 음악의 싱어송라이터인 동시에 다분히 록적인 음악가로도 보입니다.
음악 활동 중지 규제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고 두 살배기 아들이었던 ‘이규형’이라는 이름으로 1978년
"한동안 뜸했었지"와 1979년 "장미"를 작곡하여 한국 록의 또 다른 개척자이자 위대한 밴드인 ‘사랑과 평화’에게 주고, 프로듀스한 사람
또한 이장희였습니다. 아마도 ‘사랑과 평화’가 이뤄냈던 음악적 성과의 일부분을 그에게 돌린다 하여도 잘못되거나, '사랑과 평화'가 억울해 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과 취향으로만 말을 한다면 - 물론 지금까지 써내려 온 글이 그렇습니다만 - "사랑과 평화" 이후 현재까지 그들을
뛰어넘는 록밴드는 아직 보질 못했습니다. 1977년 MBC 대학 가요제가 생긴 이래로 대학 밴드를 비롯한 수많은 록밴드가 생겨났다가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여러 밴드가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지만, 한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중 최후의 자리를 차지한 "사랑과 평화" 이후 그들을 뛰어넘는 록밴드를 아직 못 봤습니다. 참으로 아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록과 포크의 전설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신중현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한대수 등이 헐벗고 굶주리는 아시아의 변방에서
태어나지 않고 영국이나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비틀스, 롤링 스톤즈,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영,미의 록이나 포크의
전설들이라 불리는 음악가들과 최소한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그들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충분한 - 참으로 아까운 전설들입니다.
특히 신중현 씨는 정말로 아까운 인물이라 그 아쉬움이 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