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 Condor Pasa / Simon & Garfunkel
안데스 산맥에서 비상하는 콘도르.
안데스 고산지대에 소수가 남아 있는 보호되는 새로서
콘도르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라는 뜻이다.
또한 잉카인들의 신앙에 의하면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존재로 인식했다. 기독교의 천사와 같은 의미일 게다.
엘 콘도르 파사 (El Condor Pasa)
70년대를 풍미했던 사이먼&가펑클의 노래 "엘 콘도르 파사"를 듣노라면, 바람의 소리가 들리는 듯 그 우수에 찬 선율이 가슴에 촉촉이 적셔 드는 듯한 느낌이다. 우리말 제목을 '철새는 날아가고'로 번안하여 정훈희를 비롯하여 많은 가수가 불렀었던 이 노래의 가사는 여타 사이먼&가펑클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그 내용이 대중가요답지 않게 자못 사색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엘 콘도르 파사'의 엘El은 영어 정관사 the와 같고, 파사pasa는 pasar 동사의 직설법 3인칭 단수 현재 어미 변화이고 영어의 pass라는 뜻이다). 이 노래가 잉카의 토속음악을 뿌리로 한 것이라는 사실은 노래를 배울 당시에도 알고 있었지만 그 노래에 얽힌 슬픈내력에 대하여 알게된 것은 한참 후였다. 그 슬픈 내력이라는 것은....
익히 알다시피 빛나는 문명을 자랑하던 잉카는 1533년, (1513년 발보아와 함께 태평양을 발견한 인물 중 하나이며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의 친척인)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허망하게도 하루아침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태양 숭배와 황금으로 유명했고 복잡한 2진 코드(binary code)를 사용하는 등 고도로 통합적이고 기능적인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제국이 말 37필을 갖고 있던 고작 180명밖에 안되는 스페인 군인에게 망하고 만 것이다. 그 후 인디오들은 스페인의 압제 아래 노예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200여 년 간 지속한 가혹한 수탈에 원주민들의 슬픔과 분노가 폭발한 것이 1780년 페루의 농민반란이었다. 그러나 6만여 명이 일으킨 이 반란은 스페인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그 중심인물이었던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는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체포된 "콘도르칸키"는 자신의 처와 아들 그리고 수많은 동료가 차례로 죽어나가는 것을 보아야 했고 그 자신도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받았다. 그러나 말들이 말을 안 들어 거열형이 실패하자, 스페인인들은 그의 목을 자르고 내장을 파낸 뒤, 사지를 잘라냈다고 한다. 스페인인들이 이렇게 참혹하게 그를 처형한 것은 그만큼 그와 원주민들의 저항에 두려움을 느꼈고 그러한 반란이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려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지가 잘려나가는 방법으로 잔혹하게 처형당했지만, 민중의 원망을 끌어안고 분연히 떨쳐 일어섰던 그의 존재는 스페인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상징하는 빛나는 징표가 되었다. 그리하여 잉카의 후예들은 영웅이 죽으면 콘도르가 된다는 그들의 전설처럼 그도 역시 죽어서 콘도르가 되었다고 믿고 있다.
‘엘 콘도르 파사’의 원곡은 페루의 클래식 음악 작곡가인 "다니엘 알로미아스 로블레스"가 잉카의 토속음악을 바탕으로 해서 1913년에 작곡한 오페레타 "콘도르칸키"의 테마 음악이다. 그는 이 음악 속에 마치 일제의 압제를 피해 간도로 떠났던 우리 조상들처럼 마추픽추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잉카인들의 슬픔과 "콘도르칸키"의 운명을 표현해냈던 것이다.
이 노래에는 원래 가사가 없었지만, 후에 사람들이 구전되어 내려오던 "콘도르칸키"의 이야기를 노랫말로 만들어 붙였는데, 따라서 가사의 내용은 각각이 서로 다르다. 또 대개는 가사 없이 페루의 전통악기인 케냐와 삼포냐로 연주한 것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가사는 잉카의 언어였던 ‘케추아’어이며, 내용은 "콘도르칸키"의 절절한 마음을 담은 것으로, 대략 다음과 같다.
오, 하늘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콘도르여,
우리를 안데스 산맥의 고향으로 데려가 주오.
잉카 동포들과 함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가 가장 바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콘도르여.
쿠스코 광장에서 나를 기다려 주오.
우리가 마추픽추와 와이나픽추를 거닐 수 있게 해주오. *
페루 전통악기로 연주하는 '엘 콘도르 파사'
피리 같은 게 케냐, 팬플룻 같은 게 삼포냐.
1분 50초부터 보컬.
그 때 나는 마치 어떤 천체의 감시자가
시계(視界) 안에 한 새 유성의 헤엄침을 본 듯,
또는 장대한 코르테스가 독수리 같은 눈으로
태평양을 응시하고―모든 그의 부하들은 미친 듯
놀라 피차에 바라보는 듯―말없이 다리엔의
한 봉우리 위에서.
<키이츠의 채프먼의 호머를 처음 보았을 때 中>
♣
시에서 '코르테스'는 1513년 9월25일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태평양을
발견한 스페인 태생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를 이름이다.
이 낭만파 시인의 눈에 펼쳐진 태평양은 이름 그대로
<이때껏 본 적이 없는, 순수한 고요의 지경(地境)>이었을 것이며,
마치 천체의 감시자가 <시계 안에 새 유성이 헤엄침을 본> 듯 했으리라.
그러나 탐욕에 절은 탐험가 발보아가 <독수리의 눈>을 번득이며 실제
보았던 것은, 애타게 찾고 있던 전설 속 황금의 땅, 바로 '엘도라도'였다.
♣
우리는 그 옛날 지리시간에 "지리상의 발견"이라 하여 유럽인들의
신대륙 개척의 역사를 한껏 미화된 필체를 통해 배웠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나 그 과정은 독일의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통렬하게
지적한 대로, 개인의 탐욕과 시대의 혼돈이 낳은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지구 전 표면의 3분의1이 넘고, 전체 해양의 절반을 차지하는 태평양
그 연안과 연이은 광활한 대륙에는 이미 수많은 동양인들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장구한 세월을 살아 왔기에 그 곳들을 그들이 처음으로 '발견'했다는
유럽인의 주장에 선듯 동의할 수 없으며 그런 사고방식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들의 역사에서 '광기와 우연' 못지않게 정복자의 '오만과 억지'를
읽게 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는 칼라일의 발언이 오늘날
'오리엔탈리즘의 편견'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그 진의와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는 정복자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란 다 그런 것이다. (펌)